1986년 7월 24일.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 두달을 앞 둔 이날 ‘성공한 사람이 타’는 현대자동차 그랜저가 세상에 나왔다.
당시 국내 도로에는 현대차의 중소형 쏘나타, 포니, 엑셀과 대우자동차의 로얄시리즈 등이 주을 이뤘다.
여기에 대형 그랜저(당시 2.0, 2.4, 3.0)는 최고 배기량의 세단으로 ‘성공한 사람을 위한 차’, 어린이에게는 ‘커서 꼭 타야 하는 차’로 자리 잡았다.
그랜저는 이후 2세대(1992년 9월), 3세대(XG, 1998년 10월), 4세대(TG, 2005년 5월), 5세대(HG, 2011년 1월), 6세대(IG, 2016년)를 거치면서 여전히 성공한 사람을 위한 가족 세단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랜저가 출시 이후 1985년 선보인 자사의 중형 쏘나타와 국산차 판매 1, 2위를 다투고 있는 이유이다.
19일 출시된 6세대 부분변경 모델인 신형 그랜저를 이날 타고 자유로를 달렸다.
이날 이른 아침. 현대차 서울 양재 사옥 1층에 전시된 신형 그랜저를 먼저 살폈다. 그랜저 외관에서 가장 눈에 확 들어보는 부분이 바로 전면 라디에이터 그릴이다.
기존에 없던,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라디에이터 그릴이다. 그물(메쉬) 형태의 플라스틱 라디에이터그릴 사이사이를 유광 크롬 질감의 진공 증착한 재질을 채우면서 고급감과 함께 개성을 살렸다.
그랜저와 동시대인인 1980년대 생들이 중장년의 성공한 사회인으로 자리 잡고, 이들 세대가 기존 문화를 따르기 보다는 개성과 나만의 길을 중요시 하고 있느 점을 반영한 것이다.
현대차가 차량의 얼굴인 라디에이터그릴을 세심하게 다듬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다만, 기존 심심한 라디에이터에 길들여진 일부는 다소 부담스럽다는 촌평도 내고 있다.
헤드라이트 역시 라디에이터그릴 형태로 날카롭게 변했다. 이지적이고 차가운 느낌이다. 하단 그릴과 좌우측 그릴 역시 메쉬 형태의 크롬으로 상단 그릴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전면부에 통일감을 제공하고 있다.
측면 디자인은 풍성하다. 두개의 선이 공기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흙받이(휀다) 역시 구획을 둔 게 이전 모델과는 다르다.
측면의 두 줄은 후면부 선으로 이어진다. 측면 디자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게 알로이 휠이다.
5개의 V자형 스포크 위에 4개의 스포크가 올라간 형태의 휠은 밋밋함을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1990년대 출생)를 위한 현대차의 전략으로 풀이된다.
후면부 디자인은 굴곡이 극대화 됐다. 기존 후미등을 연결하던 얇은 선은 두꺼워지고 후면부로 튀어나온 형태로 변했다.
후면 더블 배기구는 기존 크롬 재질을 유지하고 있지만, 각각의 배기구가 가운데 크롬으로 갈라진다. 마치 4개의 배기구가 자리한 느낌이다. 후미등 역시 상대적으로 얇아지면서 차체에 세련미를 더하고 있다.
신형 그랜저의 전체적인 외관은 쿠페형 스포츠 세단임을 강조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신형 그랜저의 옥에 티라면 지붕의 샤크 테일(상어지느러미 형태의 안테나)이다. 2000년대 중반 샤크 테일이 처음 나왔을 때는 신선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깔끔한 차체를 구현하기 위해 없애는 추세이다.
스마트키로 문을 열고 본 신형 그랜저의 첫 느낌은, BMW 최고급 세단 7시리즈를 보는 느낌 정도. 그만큼 신형 그랜저가 고급스러워졌다는 뜻이다. 12.3인치 대형 액정표시장치(LCD)와 같은 크기의 계기판(클러스터) 등이 시원시원하다. 여기에 도어 패널과 도어내 캐치, 적재적소에 탑재된 크롬 재질이 최고급 세단을 방불케 한다.
여기에 고급 차량에만 실리는 나파가죽 시트가 인테리어에 고급감을 부각하고 있다. 나파 가죽은 착좌감이 부드럽고 우수하다.
모니터 아래 센터페시아는 간결해졌다. 차량 조작 버튼이 최소화 됐고, 깔끔한 실내를 위해 변속기도 버튼씩으로 변했다. 버튼 역시 크롬 재질로 세련미와 고급감을 모두 잡았다.
완성차 업체들이 다소 소홀하게 처리하는 2열 역시 그랜저는 다르다. 도어 패널에 1열과 마찬가지로 ‘GRNANDEUR’가 새겨진 크롬 재질을 둘렀고, 스키쓰루(2열과 크렁크의 연결문)를 내리면 대형 팔걸이 역시 같은 시트와 같은 재질로 고급감을 극대화 했다.
신형 그랜저의 축간거리(휠베이스)가 40㎜, 전폭이 10㎜ 확대돼 실내 공간이 넉넉하다. 신장 190㎝인 탑승객이 타도 2열 레그룸이 남는다. 신형 그랜저는 전장 4990㎜로 기존보다 60㎜ 늘었고, 전폭 1875㎜, 전고는 1470㎜로 변하지 않았다. 휠베이스는 2885㎜이다.
반투명 플라스틱 재질의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3,3 가솔린 엔진이 조용하다. 시동을 걸자 도어와 대시보드 하단 등에 조명이 들어온다. 최근 화려해지고 있는 트렌드를 그랜저도 가진 것이다.
양재 사옥에서 나오자마자 경부고속국도를 잡았다. 어느새 출근 시간이 돼서 차량이 많다. 서울요금소부터 한남대교까지는 상시 정체구간이다. 변속 버튼 아래 오토홀드 단추를 눌렀다.
차량 지정체 구간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차가 움직이지 않는 기능이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차가 나가고 다시 브레이크를 밟고 발을 떼도 차가 멈춰 있다. 이는 최근 출시되는 국내외산 대부분 차량이 적용되는 편의 사양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자, 사이드미러가 분주하다. 차량 좌우측 사각지대에 차가 들어오자 미러 바깥쪽에 붉은색으로 차량 두대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사각지대 경보 장치이다.
강변북로를 잡기 위해 한남대교 북단에서 유턴했다. 왼쪽 방향지시등을 켜자 계기판 왼쪽에 차량 왼쪽 부근이 보인다. A필러(기둥) 때문에 시야를 확보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한 현대차의 최신 기술이다, 유턴후 2차선 진입을 위해 오른쪽 방향지시등을 켜자 이번에는 계기판에 오른쪽에 나타난다. 이는 안전 주행을 도와주는 ‘후측방 모니터(BVM)’ 기능이다.
후방카메라와 전방카메라, 측면 카메라 등으로 그랜저가 차량의 있는 6곳의 사각지대를 모두 잡았다.
자유로에 들어서자 빈공간이 생긴다. 가속 페달을 밟자 3.3 엔진은 소리 없이 속도를 올려 6초 만에 시속 100㎞(제로백, 1700rpm)에 이른다.
통상 2.0 터보 엔진이나 3,0 엔진 등이 1500rpm 미만에서 제로백을 찍는 점과 비교하면 최고 출력 290마력, 최대 토크 35㎏·m을 실현한 3.3 V6엔진이 다소 아쉽다. 연비는 8단 자동변속기와 조합으로 9.6㎞/ℓ(4등급)로 나쁘지 않다.
파주 출판단지를 지나자 출근 차량이 뜸하다. 그랜저 3.3의 속도를 올리자 120㎞(2000rpm), 140㎞(2300rpm), 160㎞(2600rpm)에 금새 다다른다. 이어 신형 그랜저는 180㎞에 이어 200㎞(3200rpm)에 8초 만에 다다른다. 그랜저가 요즘 속도를 즐기는 성공한 사람에게 최적화됐다는 생각이다.
파주 출판단지부터 임진각까지는 일부구간이 2차로로 줄고 노면이 다소 불규칙한 점을 알지만, 그랜저의 가속 페달을 더 깊숙이 밟았다. 이미 2014년 그랜저 2,2 디젤를 타고 220㎞ /h로 이 구간을 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형 그랜저 3.3은 같은 속도에서 포뮬러(F)1 머신처럼 무게 중심이 차체 하부에 형성되면서 민첩한 주행성능을 보인다. 그랜저가 앞바퀴 굴림이지만 4륜구동처럼 네바퀴가 지면을 꽉 움켜쥐고 달린다는 느낌이 운전대와 함께 온몸에 전해진다.
여기에는 19인치 알로이 휠에 폭 245㎜, 편평비 45%인 래디알 구조의 미쉐린 타이어도 큰 기여를 한다.
미쉐린 타이어는 주행소음도 잡았다. 주행 중 노면과 타이어 마찰로 생기는 소음이 적다. 최근 국산차 업체들이 자사의 고급 모델에 성능이 우수한 외산 타이어를 장착하고 있는 이유이다. 신형 그랜저의 풍음 역시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220㎞로 달리다 도로 이음새와 불규칙한 노면을 만났다. 신형 그랜저는 다소 출렁거린 이후 바로 자세를 잡는다. 현대모비스가 2000년대 중후반 개발한 능동형차체자세제어장치(ESP)가 신형 그랜저에 기본으로 실려서 이다.
핸들링도 탁월하다. 기존 2.2 디젤이 고속에서 핸들 떨림이 다소 감지됐으나 이번 신형 그랜저는 날렵하면서도 운전대의 무게 중심이 아래로 쏠린다.
신형 그랜저는 멈추기도 잘 한다. 200㎞ 이상의 속도에서도 탑승객의 쏠림 현상이나 차체의 출렁거림 없이 스르르 멈춘다.
2010년대 초 시속 200㎞로 국산 SUV를 몰고 고속국도 1차선을 달리다 급하게 끼어든 군용차를 피하기 위해 급브레이크시 차량이 크게 요동치던 경험이 떠올랐다. 현대차의 완성차 제작 기술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임진각을 앞두고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어 세종대왕 재임 기간 영의정을 18년간 지낸 황희 정승이 말년에 머물렀다는 반구정을 찾았다. 반구정을 지나 한적한 오솔길에서 신형 그랜저를 꼼꼼히 살폈다.
주차 브레이크는 최근 트렌드에 충실하다. 이중으로 변속기 옆 크롬재질의 ‘P’ 버튼을 누르면 빨간 불이 들어온다. 아울러 번튼식 변속기(R-N-D) 아래 버튼식 전자브레이크도 있다. 고객의 안전을 위한 현대차의 세심한 배려이다.
신형 그랜저는 대형 JBL 오디오 시스템을 장착했다. JBL은 명품 오디오 브랜드 하만 카돈 그룹 산하의 스피커 전문브랜드로 중저음 영역 대에서 강하다. 오솔길에서 듣는 음악이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한다.
최근 현대차는 신차에 파노라마 썬루프와 쿼터 유리(2열 창문 뒤쪽의 쪽유리)를 기본으로 적용해 차량의 개방감을 극대화 하고 있다.
신형 그랜저의 트렁크에는 스페어타이어와 비상 삼각대가 없다. 고급 세단이라 2열이 접히지 않는 대신, 스키쓰루가 있어 긴짐을 싣는데 무리가 없다. 트렁크 도어는 키와 운전석에서만 열 수 있다.
실내 수납공간이 다양한 점도 신형 그랜저의 장점이며, 2열은 독립 냉난방이다.
방향지시등을 전면 라디에이터그릴에서 누운 ‘V’자 형태로 크롬 재질에 불이 들어온다. 독창적이다.
아울러 신형 그랜저는 공기청정 시스템, 2세대 스마트 자세제어 시스템, 전방 충돌방지 보조-교차로 대향차(FCA-JT) 기술 등 현대차 최초로 적용한 신사양을 비롯해 최첨단 안전 편의사양이 대거 기본으로 지녔다.
이밖에 신형 그랜저에는 고속도로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전용도로까지 확대 적용된 ‘고속도로 주행 보조(HDA)’, 후진시 후방 장애물을 감지해주는 ‘후방 주차 충돌방지 보조(PCA)’, 정차 후 후측방 접근 차량을 감지하면 뒷좌석의 문을 잠그고 경고하는 ‘안전 하차 보조(SEA)’, 스마트키를 이용해 차량을 앞뒤로 움직여 협소한 공간에서도 주차와 출차를 편리하게 하도록 돕는 ‘원격 스마트 주차 보조(RSPA)’ 등도 기본으로 가졌다.
신형 그랜저는 가성비도 잡았다. 이번에 시승한 3.3 가솔린(3578만 원~4349만 원), 2.5 가솔린(3294만 원~4108만 원), 2.4 하이브리드(3669만 원~4489만 원), 일반용 3.0 LPi(3328만 원~3716만 원) 등으로 고객 선택의 폭이 넓다.
이상엽 현대차디잔인센터장(전무)은 “성공의 대명사 그랜저가 21세기 성공의 의미를 새롭게 쓰고 있는 고객을 위해 최고급 세단으로 재탄생했다”며 “압도적인 상품성으로 무장한 신형 그랜저가 세단 시장의 성장과 함께 국산차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형 그랜저가 시각, 청각, 촉각뿐만이 아니라 후각과 미각(반구정 옆에 맛집이 있다)까지 충족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편, 신형 그랜저는 이달 초중순 11일간 3만2179대의 사전 구매 계약을 달성했다. 이는 2016년 선보인 6세대 그랜저가 14일간 기록한 2만7491대를 앞선 것이다. 이로써 그랜저는 3년 연속 국산차 판매 1위 등극에 파란불을 켰다. 올해 1∼10월 판매에서 쏘나타(8만2599대)는 그랜저(7만9772대)보다 2827대 많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