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보고 있으면 여느 다른 픽업들과 살짝 다른 실루엣을 갖고 있다. 이제야 알아챘다는 게 이상하다. 전에도 날렵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지붕 쪽 폭이 좁다는 건 몰랐다. 윈드스크린도 많이 누운 느낌이다. 든든한 보디에 안정된 자세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상적인 비율을 보여주는 것이 과히 스포츠카 분위기도 난다. 바로 얼마 전 타본 포드 레인저 랩터 모델 이야기다.
강인한 인상도 만들어 낸다. 그릴에 붙은 'FORD' 레터링은 픽업 하면 역시 포드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도전적 의미의 존재감을 부각한다. 보닛 아래는 이전 모델과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 파워트레인은 4륜구동 기본, 2.0 직렬 4기통 트윈터보 엔진을 얹고 10단 자동변속기가 탑재됐다. 최고출력은 210마력, 최대토크는 51㎏·m를 발휘한다. 그렇다. 레인저는 아직 디젤 엔진을 쓰는 몇 안 되는 픽업 중 하나다. 실린더 회전수에는 한계가 있지만, 폭발력은 가히 놀랍다.
미국 전용 모델은 디젤이 없다. 그러면서도 정통 픽업트럭이라고 할 수 있나? 있다! 미국인들 기준에서는 아쉽겠지만, 사실 한국 도로 사정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도 차고 넘친다. 오히려 랩터가 너무 화려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꾸밈새를 줄여 톤 다운시킨다면 레인저 와일드트랙으로 가면 된다. 조금 덜 부담스럽고 무난한 걸 원한다면 쉐보레 콜로라도도 있다. 이제 국내에서도 픽업의 선택지가 넓다는 사실에도 행복감을 느낀다. 대신, 어설프게 비교를 했다가는 이 차의 가격표가 좌절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신형 랩터는 7990만원의 가격표를 달았다. 이전 모델 6390만원조차 살짝 부담이었는데, 누구에겐 이제 엄두도 못 낼 지경이다. 환율이 세다고 한들, 실내 구조(인테리어와 디지털화된 시스템 모두 업그레이드됐다)가 대폭 바뀌었다고 한들, 세대 변경에 1600만원의 가격 오름세는 조금 과하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가격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따져보자면 ‘깡통에서 풀옵션까지 간다’는 속설에 따라 조금씩 보태다 보면 풀사이즈 픽업 GMC ‘시에라’가 눈에 밟히게 된다. 개성을 사겠다면 끌리는 대로 가야지, 그러지 않으면 공허함만 생길 뿐이다. 후회할 일은 쌀 때 사지 않은 것일 뿐.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
랩터의 중요 포인트는 비포장도로를 고속도로처럼 달릴 수 있는 터프함이다. 포드에서는 이를 ‘Built for Tough’라고 하더라. 국내 픽업 세그먼트에서는 대체재가 없는 독특한 개성이다. 희소성 원칙에 따르자면 매우 높은 가치로도 다가온다. 실제 가속 페달을 밟아보면 부드럽지만 강하게 나아간다. 디젤 엔진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스포츠 모드로 바꿔 달리면 확실히 더 활기찬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오프로드 욕심이 생길 만하다. 단순 출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 차가 가진 안정적인 자세가 좋다는 의미다. 마음 같아서는 굳이 험로를 찾아 극한까지 괴롭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하다. 4H, 4L, 2H, 4A의 능동형부터 머드, 샌드, 스노우 등 다양한 악천후 상황에 특화된 드라이브 모드도 넉넉하게 갖춰져 있어 사계절 어디서나 거칠 게 없다.
조향대를 붙잡고 있으면 픽업의 아우라도 느껴진다. 익숙해진 오프로더가 아니라 전방 시야에 들어오는 빵빵한 보닛으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는 비율적 후방 트럭 베드의 아우라다. 국내 안전규제 때문에 리어 윈도우는 밀폐형이 됐지만, 괜찮다. 285㎜/70/17인치의 초광폭 타이어가 걸러주는 노면 떨림이라든지, 만족스러운 승차감, 정숙성(비교적)이 그만한 개성으로 찾아온다.
여하튼 하차감(이라 읽고 ‘자기만족’이라고 말한다)은 그야말로 최고다. 압도적 이미지에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자신감이 있다. 오늘만 살자고 하는 호레이스의 시처럼, 멋을 알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차는 스포츠카를 소유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러니하게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