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프 그랜드 체로키 4xe를 시승했지만, 의외의 승차감에 놀랐다. 항상 ‘지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오프로드’가 먼저였기에 큰 기대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윌리스에서 랭글러로 대표되던 지프의 이미지는 전쟁 나면 가장 먼저 끌려가야 하는 운명의 전지형 주파 능력을 갖춘 다목적 차량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선입견이었다. 실제는 격식 갖추고 타야하는 프리미엄 차였다는 걸 말이다. 이번 시승을 통해 이미지가 확실히 달라졌다. 부드럽게 치고 나가면서도 단단하고 때에 따라 말캉말캉한 하체 느낌과 실내 정숙성까지 갖췄는데, 프리미엄 독일 3사의 차들이 크게 부럽지 않다.
물론, 혹시라도 전쟁이 난다면 그랜드 체로키 4xe는 동원 1순위로 꼽힌다. 그 이유는 목숨 걸고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기도 많이 실을 수 있고 편안하고 좋은 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참고로 구형은 면제 대상이 될 수 있다. 전쟁이나면 국토교통부에서 SUV 차량 소유주에게 동원 명령서를 보낸다. 불복종 시에는 벌금이나 심하면 구속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당장 그랜드 체로키의 대항마라고 할 수 있는 차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만, 만약 지휘관으로 군용차를 선택한다면 이만한 차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여기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일단 시승차는 ‘4xe’ 배지를 달고 있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파워트레인을 탑재했다. 얼핏 전시에 무슨 충전이야 하겠지만, 전쟁이 나면 시가전이 십중팔구일 터다. 충전도 가능하고 일단 한 번 충전이 돼 있다면 일반 내연기관 모델보다 더 멀리, 더 오래 달릴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 된다. 진격을 위해서라도 퇴각을 위해서라도 주행가능 거리는 길면 길수록 좋다. 참고로 파워트레인은 각각 63마력, 145마력을 내는 2개의 전기모터와 400V 리튬이온 배터리팩과 2.0ℓ 직렬 4기통 가솔린 엔진(272마력), 그리고 쿼드라 트랙II 지프의 사륜구동 기술이 접목된 8단 자동변속기로 구성됐다.
라인업 다른 모델들과 달리 3열 시트를 빼놓고 하부에 스페어타이어를 넣어둬 장비도 지구력도 끈기도 모두 갖추고 있다. 야간 적지 공략을 위한 나이트비전까지 탑재돼 있는데, 나이트 비전은 4xe 중에서도 상위 트림인 1억1190만원짜리 서밋리저브 모델에 내장돼 있다. 이번 시승차인 서밋리저브 트림에는 이외에도 360도 서라운드 뷰 카메라(주변 지뢰 확인용?)와 운전자 졸음 감지 시스템 등이 기본으로 적용돼 있다. 실내는 고급스러운 수공예 소재가 사용됐는데 우드트림이 가장 고급스러워보이고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더불어 앞좌석 통풍시트, 운전석 12-방향, 조수석 8-방향 파워 럼버 서포트가 있는 파워 시트가 팔레르모(Palermo) 가죽으로 씌워져 있다. 마사지는 기본이다. 10.25인치 클러스터와 무드램프는 덤이다. 시스템 컨트롤은 터치에 의존하지 않고 물리적 버튼들을 두어 누가 타더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옵션으로 적용된 쿼드라 리어 에어 서스펜션은 도심 주행에서도 험로에서도 꽤 괜찮은 승차감을 제공한다. 기본적으로는 멀티링크 서스펜션이 탑재된다. 이점이 프리미엄 차로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주행모드를 바꾸면 차체가 오르락내리락 할 때 높낮이가 실제 느껴지기도 하는데, 오프로드를 달리기 전이라면 은근히 기분까지 들썩거릴 정도다. 뒷좌석 승차감도 꽤 훌륭했다. 장군의 의전용 차로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노면이 거칠어도 깊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절로 졸음이 쏟아질 정도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카리스마 있는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더 커진 세븐 슬롯 그릴은 샤크 노즈를 연상케하고 그 어느 때보다 압도적이다. 여차하면 장갑차로 보일 수 있다. 보닛이 좀 더 높아진 것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역할이 컸다. 만약 전투 위장 데칼을 입힌다면 측면 보디와 후면 역시 우람한 체격을 자랑할 거 같다는 생각이다. 최대 트렁크 공간은 2000ℓ에 달한다. 차박 정도가 아니라 기관포도 장착할 기세다. 풀사이즈 SUV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역할을 해내는 셈.
그랜드 체로키 라인업은 일반형 그랜드 체로키, 휠베이스를 늘린 그랜드 체로키 L이 있다. 후자는 3열 시트가 있는 진정한 패밀리카다. 이들은 PHEV보다는 조금 더 저렴하고 도심 사용자에게 조금 더 실용적인 성격이라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여기에 적합한 충분한 편의·안전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 차선 유지,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전후방 추돌 경고 등이 여기 포함된다. 하지만, 승차감은 확실히 이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지난 겨울 시승회에서 체로키 L을 타본 적이 있는데, 사실 이 둘은 파워트레인을 제외하고는 기술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무게감이 PHEV 쪽이 더 크다는 게 더 좋은 승차감을 느끼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